도쿠가와 장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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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장군가는 일본의 무가 가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시조로 한다. 1603년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열면서 쇼군 가문이 되었고, 이후 15대에 걸쳐 일본을 통치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도쿠가와 종가는 도쿠가와 공작가로 불렸다. 18대 당주 도쿠가와 쓰네나리는 도쿠가와 기념 재단을 설립하여 가문의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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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장군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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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가문 이름 | 도쿠가와 종가 |
가문 문양 | 둥근 세 잎 아욱 |
본성 | 칭칭, 세이와 겐지닛타 씨 지류 |
가문의 시조 | 도쿠가와 이에야스 |
가문의 종류 | 무가, 화족(공작) |
출신지 | 고즈케 국닛타 쇼 세라다 향, 미카와 국 |
근거지 | 미카와 국, 무사시 국에도 성, 스루가 국시즈오카 번, 도쿄 시시부야 구센다가야 |
주요 인물 |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히데타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쓰나요시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나리 도쿠가와 이에모치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이에사토 도쿠가와 이에히로 |
지류 | 오와리 가문 기슈 가문 미토 가문 스루가 가문 고후 가문 다테바야시 가문 다야스 가문 히토쓰바시 가문 시미즈 가문 요시노부 가문 아쓰시 가문 |
2. 역사
도쿠가와 쇼군가는 1603년(게이초 8년)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면서부터 1867년 (게이오 3년)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할 때까지 264년에 걸쳐 에도 시대 동안 쇼군 직을 세습한 가계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로서 무가 사회를 포함한 일본 사회 전체의 정점에 군림했다.[1]
이에야스는 1605년(게이쵸 10년)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2대 쇼군으로 삼았다. (이에야스는 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쥐고 있었다.) 히데타다는 차남 이에미쓰 (장남은 요절)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3대 쇼군으로 삼아, 이후 도쿠가와 쇼군가의 장남이 쇼군직을 세습하는 원칙을 정했다. 도쿠가와 쇼군가는 쇼군직 세습을 확립하기 위해 역대 당주들은 많은 측실을 거느리고 혈통 유지에 힘썼으나, 종종 직계 후계자가 없어 도쿠가와 고산케나 고산쿄 등에서 양자를 맞이했다.[1]
4대 쇼군 이에쓰나는 직계 자손이 없어 쇼군가 직계는 막부 시작 77년 만에 끊기고, 동생 쓰나요시를 양자로 삼아 5대 쇼군으로 삼았다. 쓰나요시도 친자식이 요절하여 조카인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었다. 이에노부의 뒤는 친아들 이에쓰구가 7대 쇼군이 되었지만, 1716년 (쇼토쿠 6년)에 8살로 요절하였다. 이에쓰구의 요절로 히데타다-이에미쓰 부자의 핏줄에 의한 쇼군 세습은 끊어지고, 기슈 도쿠가와가에서 요시무네를 양자로 맞이해 8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요시무네, 이에시게, 이에하루 3대에 걸쳐 70년간 직계 세습이 이어졌으나,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친자식은 모두 요절해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에서 이에나리를 양자로 맞이해 11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에나리의 뒤는 아들 이에요시 (12대), 손자 이에사다 (13대)로 이어졌지만, 이에사다는 친자가 없어 기슈가로부터 도쿠가와 요시토미 (이에모치)를 맞아 14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이에모치도 자식 없이 사망하여, 요시노부가 15대 쇼군이자 마지막 쇼군이 되었다.[1]
이에미쓰가 원복할 때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이름 중 '이에(家)' 자를 쓴 뒤로부터, '이에(家)' 자가 도쿠가와 쇼군가(도쿠가와 종가) 적남의 돌림자가 되었다. 역대 도쿠가와 쇼군 중 '이에(家)'가 붙지 않은 쇼군은 2대 히데타다, 5대 쓰나요시, 8대 요시무네, 15대 요시노부뿐이다. 히데타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데(秀)' 자를 받았고, 쓰나요시, 요시무네, 요시노부는 당초 도쿠가와 쇼군가의 적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쇼군에게서 휘를 받았다.[1]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는 대정봉환 후 쇼군직을 사임하고 신정부에 공순, 은퇴하였고, 다야스 도쿠가와가에서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종가를 이었다.
2. 1. 가문의 기원과 초기 발전
도쿠가와 쇼군가는 1603년(게이초 8년)에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가전에서는 세이와 겐지미나모토노 요시이에의 손자 닛타 요시시게의 넷째 아들 요시스에를 시조로 한다. 요시스에는 고즈케국닛타 장원 세라다 고 德川村(현 군마현오타시오지마 정)에 살면서 "도쿠가와 시로"를 칭했다. 그 자손은 아시카가 씨의 박해로 도쿠가와 마을을 떠나 지슈의 승려가 되어 여러 나라를 편력했다. 지카우지 대에 미카와국가모군마쓰다이라 고의 토호 마쓰다이라 노부시게의 사위가 되면서 마쓰다이라 씨를 칭하게 되었다. 지카우지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까지의 8대를 "마쓰다이라 8대"라고 한다. 이에야스 대에 이르러 칙허를 받아 "도쿠가와"로 "복성"했다고 한다. 이것이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공인되었던 도쿠가와 가문의 출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쓰다이라 씨를 세이와 겐지에 결부시키기 위해 날조한 계보라는 것이 현재 정설이다. 마쓰다이라 씨의 실제 출자에 대해서는 가모 씨라든가, 아리하라 씨라든가, 다양한 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명확하지 않다.
에도 시대에 만들어진 계보에서 "마쓰다이라 초대"로 여겨지는 지카우지, 2대라고 여겨지는 야스치카에 대해서는 실존 여부를 포함하여 불명확한 점이 많다. 하지만, 3대라고 여겨지는 노부미쓰는 무로마치 막부 만도코로 집사 이세씨의 피관이 되면서 마쓰다이라 향에서 이와쓰, 오카자키, 안쇼(안조)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노부미쓰의 가독을 이은 치카나가(이와쓰 마쓰다이라 가)는 16세기 초 무렵 이마가와 씨와의 전투에서 멸망했다. 대신 그의 동생 마쓰다이라 치카타다 (안조 마쓰다이라 가)가 소령가가 되어, 가모 군과 헤키카이 군의 국인 소영주를 복종시켜 세력을 뻗었고, 그의 아들 나가치카도 이마가와 씨의 침입을 막아 영토 확대를 꾀했다.[1]
나가치카와 그의 아들 노부타다의 대까지는 소령가의 절대적 지위가 확립되지 않았다. 나가치카에서 노부타다로의 가독 상속 시에는 일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노부타다는 기요야스에게 가독을 양보해야 했다.[1]
기요야스의 대에 일문을 재결집하여 안조 마쓰다이라 가의 우위를 굳히고, 미카와 국 내를 일시 통일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했다.[1] 그러나 1535년(덴분 4년)에 기요야스가 가신에게 살해되자, 마쓰다이라 씨의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영토는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기요야스의 아들 히로타다는 이마가와 씨에게 의지하여 1537년(덴분 6년)에 오카자키 성을 회복했지만, 이마가와 씨의 보호 없이는 영토 유지가 불가능하게 되었다.[1]
히로타다도 1549년(덴분 18년)에 가신에게 살해되었고, 이 때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오카자키 성에 가신을 보내 미카와 국내의 마쓰다이라 영토는 이마가와 씨의 지배 하에 놓였다.[1]
2. 2. 쇼군가 시대 (1603년 ~ 1867년)
도쿠가와 쇼군가는 1603년(게이초 8년)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면서부터 1867년(게이오 3년)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할 때까지 264년간 에도 시대를 통해 쇼군 직을 세습한 가계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로서, 무가 사회를 포함한 일본 사회 전체의 정점에 군림했다.[1]
도쿠가와 쇼군가는 대대로 장남이 쇼군직을 세습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러나 직계 후계자가 없어 도쿠가와 고산케나 고산쿄 등에서 양자를 맞이하는 경우도 잦았다. 총 15명의 쇼군 중 정실 소생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쿠가와 이에미쓰, 도쿠가와 요시노부뿐이며, 그중 초대 쇼군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쇼군이 아니었고, 요시노부는 미토 도쿠가와가 출신이므로 쇼군의 정실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미쓰뿐이다.[1]
도쿠가와 이에미쓰 이후 도쿠가와 쇼군가(도쿠가와 종가) 적남의 이름에는 '이에(家)' 자를 돌림자로 사용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역대 쇼군 중 '이에(家)'가 붙지 않은 쇼군은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5대 도쿠가와 쓰나요시,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뿐이다.[1]
2. 2. 1. 도쿠가와 막부의 성립과 통치
1603년(게이초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1] 2년 후 쇼군 직위는 셋째 아들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지만, 이에야스는 슨푸성에서 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잡았다.[2] 에도 막부 초기에는 오사카성의 도요토미 가문이 존재했지만, 1615년(겐나 원년)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멸망시키면서 이에야스가 천하인이 되었다.[3]1616년(겐나 2년) 이에야스가 사망한 후, 히데타다는 다이묘를 개역하여 통제를 강화하고, 자이 사건을 일으켜 조정도 압박했다.[4] 1624년(겐나 9년) 히데타다는 쇼군 직위를 둘째 아들 이에미쓰에게 물려주었다. 1632년(간에이 9년) 히데타다가 사망한 후 실권을 잡은 이에미쓰는 산킨코타이 제정, 쇄국 정책, 기리시탄 탄압 등을 통해 막부 권력을 강화했다.[5] 그러나 1642년(간에이 19년)부터 전국적인 대기근이 발생하여 대응에 고심했다.[6]
1651년(게이안 4년) 이에미쓰가 사망하자, 장남 이에쓰나가 11세로 4대 쇼군이 되었지만, 병약하여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하고, 막정은 오대로 사카이 다다키요가 주도했다.[7] 1680년(엔포 8년) 이에쓰나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동생 쓰나요시가 5대 쇼군이 되었다.[8] 쓰나요시는 다다키요를 파면하고 다이묘와 하타모토를 숙청하여 쇼군 권력을 회복하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등 측근에 의한 소요닌 정치를 행했다. 유학에 열심이었지만, 생류연민령의 남발로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9]
1704년(호에이 원년) 쓰나요시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쓰나시게의 장남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었지만 재직 4년 만에 사망했다. 장남 이에쓰구가 4세로 7대 쇼군이 되었지만, 1716년(교호 원년) 8세로 사망했다.[10]
기슈 가문에서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8대 쇼군으로 취임하여 교호 개혁을 주도하여 검소 검약으로 재정 재건에 힘썼다.[11]
1745년(엔쿄 2년) 요시무네로부터 쇼군 직을 물려받은 장남 이에시게는 허약하고 언어 불명료했기 때문에, 정치를 주도하지 못했다. 1760년(호레키 10년) 이에시게는 은퇴하고 장남 이에하루가 쇼군이 되었지만, 취미에 몰두하고 노중 다누마 오키쓰구가 막정을 주도했다. 재직 중 덴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
1786년(덴메이 6년) 이에하루가 사망하고, 잇키 가문에서 입적한 이에나리가 11대 쇼군이 되었다. 재직 중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이 있었고, 화려함과 사치는 철저하게 단속되었다. 1837년(덴포 8년) 이에나리가 은거하고 차남 이에요시가 12대 쇼군이 되었고, 재직 중 미즈노 다다쿠니의 덴포 개혁이 있었고, 검약령과 풍속 단속을 철저하게 하여 민중을 엄격하게 탄압했다.
1853년(가에이 6년) 페리 함대의 우라가 내항 직후 이에요시가 사망하고, 넷째 아들 이에사다가 13대 쇼군이 되었지만, 병약하고 유치한 기행이 많이 나타났다. 자식이 없어, 후계자를 둘러싸고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와 기슈 요시토미(이에모치)의 대립이 있었지만, 1858년(안세이 5년) 이에모치가 14대 쇼군으로 선언되었다.
이에모치는 막부의 권위 회복을 위해 공무합체를 추진, 조정으로부터 황녀 가즈노미야 사치노나이 신노를 하가 받았지만, 쇠퇴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고, 제2차 정장 전쟁의 패전 소식과 파괴 등 민중의 막부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1866년(게이오 2년) 실자 없이 사망했다.
2. 2. 2. 역대 쇼군과 주요 정책
1603년(게이초 8년)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면서부터 1867년(게이오 3년)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할 때까지 264년 동안 에도 시대를 통해 쇼군 직을 세습했다.[1] 초대 쇼군 이에야스는 1605년(게이쵸 10년)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2대 쇼군으로 삼았다. 이후 히데타다는 차남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3대 쇼군으로 삼아, 대대로 도쿠가와 쇼군가의 장남이 쇼군직을 세습하는 원칙을 정했다.[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게 직계 자손이 없어 도쿠가와 쇼군가의 직계는 막부가 시작한 지 77년 만에 끊어져, 방계인 동생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양자로 삼아 5대 쇼군으로 삼았다. 쓰나요시도 친자식이 요절하여 이에쓰나의 동생이자 쓰나요시의 형인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장남이자 조카인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었다. 이에노부의 뒤는 친아들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7대 쇼군이 되었지만, 1716년(쇼토쿠 6년) 8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에쓰구의 요절로 히데타다-이에미쓰 부자의 핏줄에 의한 쇼군 세습은 끊어지고, 기슈 도쿠가와가에서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양자로 맞이해 8대 쇼군에 취임하였다.[1]
도쿠가와 요시무네, 도쿠가와 이에시게, 도쿠가와 이에하루 3대에 걸쳐 70년간 직계 세습이 이어졌으나,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친자식 딸과 아들 모두 요절해 고산쿄 중 하나인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에서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양자로 맞이해 11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에나리의 뒤는 아들 도쿠가와 이에요시(12대), 손자 도쿠가와 이에사다(13대)로 이어졌지만, 이에사다에게 친자가 없어 다시 기슈 도쿠가와가에서 도쿠가와 요시토미(도쿠가와 이에모치)를 맞이해 14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이에모치도 자식 없이 사망, 미토 도쿠가와가에서 태어나 히토쓰바시가의 당주가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5대 쇼군이자 마지막 쇼군이 되었다.[1]
역대 도쿠가와 쇼군으로 휘에 "이에(家)"가 붙지 않은 쇼군은 2대 도쿠가와 히데타다, 5대 도쿠가와 쓰나요시, 8대 도쿠가와 요시무네,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뿐이다. 히데타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히데(秀)"를 받았고, 쓰나요시, 요시무네, 요시노부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적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쇼군으로부터 휘를 받았다.[1]
1603년(게이초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어 에도에 막부를 열었다. 쇼군 직위는 2년 후 셋째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었지만, 슨푸성에서 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잡았다. 1615년(겐나 원년)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멸망시키면서 이에야스가 천하인이 되었다.[1]
1616년(겐나 2년) 이에야스 사후 실권을 잡은 히데타다는 수많은 다이묘를 개역하여 통제를 강화하고, 자이 사건을 일으켜 조정을 압박했다. 1624년(겐나 9년) 히데타다는 쇼군 직위를 둘째 아들 도쿠가와 이에미쓰에게 물려주었고, 1632년(간에이 9년) 히데타다 사망 후 실권을 잡은 이에미쓰는 산킨코타이 제정, 쇄국 정책, 기리시탄 탄압 등을 통해 막부 권력을 강화했지만, 1642년(간에이 19년)부터 전국적인 대기근이 발생하여 대응에 고심했다.[1]
1651년(게이안 4년) 이에미쓰가 사망하자 장남 도쿠가와 이에쓰나가 11세로 4대 쇼군으로 선언되었지만, 선천적으로 병약하여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하고 막정은 오대로 사카이 다다키요가 주도했다. 1680년(엔포 8년) 이에쓰나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동생 도쿠가와 쓰나요시가 5대 쇼군이 되었다. 다다키요를 파면하고 다이묘와 하타모토 숙청을 많이 실시하여 쇼군 권력을 회복하고, 야나기사와 요시야스 등 측근에 의한 소요닌 정치를 행했다. 유학에 열심이었지만, 생류연민령 남발로 사람들을 괴롭게 했다.[1]
1704년(호에이 원년) 쓰나요시가 아들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자 쓰나요시의 형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장남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었지만 재직 4년 만에 사망했고, 장남 도쿠가와 이에쓰구가 4세로 7대 쇼군이 되었지만 1716년(교호 원년) 8세로 사망했다.[1]
기슈 가문에서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입적하여 8대 쇼군으로 선언되었다. 교호 개혁을 주도하여 검소 검약으로 재정 재건에 힘썼다.[1]
1745년(엔쿄 2년) 요시무네로부터 쇼군 직을 물려받은 장남 도쿠가와 이에시게는 허약 체질에 언어 불명료했기 때문에 정치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1760년(호레키 10년) 이에시게는 은퇴하고 장남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쇼군이 되었지만, 취미에 몰두하고 노중 다누마 오키쓰구가 막정을 주도했으며, 재직 중 덴메이 대기근이 발생했다.[1]
1786년(덴메이 6년) 이에하루가 사망하고 잇키 가문에서 입적한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11대 쇼군으로 선언을 받았다. 재직 중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의 간세이 개혁이 있었고, 화려함과 사치는 철저하게 단속되었다. 1837년(덴포 8년) 이에나리가 은거하고 차남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12대 쇼군이 되었고, 재직 중 미즈노 다다쿠니의 덴포 개혁이 있었고 검약령과 풍속 단속을 철저하게 하여 민중을 엄격하게 탄압했다.[1]
1853년(가에이 6년) 페리 함대의 우라가 내항 직후 이에요시가 사망하고 넷째 아들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13대 쇼군이 되었지만, 병약하고 유치한 기행이 많이 나타났다. 자식이 없어 후계자를 둘러싸고 히토쓰바시 요시노부와 기슈 요시토미(이에모치)의 대립이 있었지만, 결국 1858년(안세이 5년) 이에모치가 14대 쇼군으로 선언되었다.[1]
이에모치는 쇠퇴하는 막부 권위 회복을 위해 공무합체를 추진하기 위해 조정으로부터 황녀 가즈노미야 사치노나이 신노를 하가 받았지만, 쇠퇴에 제동이 걸리지 않았고, 제2차 정장 전쟁 패전 소식과 파괴 등 민중의 막부에 대한 원성 소리가 높아지는 가운데 1866년(게이오 2년) 실자 없이 사망했다.[1]
미토 가문 출신으로 히토츠바시 가문의 당주였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게이오 2년(1866년)에 마지막 15대 쇼군으로 취임했다. 게이오 3년(1867년) 10월에 대정봉환을 실시하여 신체제에서의 실권 확보를 노렸지만, 12월 왕정복고의 대호령과 사관납지의 칙명으로 저지되었고, 게이오 4년(1868년) 1월 도바-후시미 전투를 일으켰지만 참패하여 에도로 도망쳤다. 조정의 적이 된 요시노부를 추토하기 위해 동정군이 에도로 진군하는 가운데, 항복을 결의한 요시노부는 에도성을 퇴거하고 우에노에서 근신했다.[1]
2. 2. 3. 쇼군직 계승 문제
초대 쇼군 이에야스는 1605년(게이쵸 10년)에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2대 쇼군으로 삼았다. (이에야스는 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쥐고 있었다.) 히데타다는 차남 이에미쓰 (장남 초마루는 요절)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3대 쇼군으로 삼아, 이후 도쿠가와 쇼군가의 장남이 쇼군직을 세습하는 원칙을 정했다.[1] 역대 당주들은 쇼군직 세습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측실을 거느리고 혈통 유지에 힘썼으나, 종가는 종종 직계 후계자가 없어 가까운 친척의 분가나 도쿠가와 고산케, 고산쿄에서 양자를 들여 가계를 이었다.[1]4대 쇼군 이에쓰나는 직계 자손이 없어 쇼군가 직계는 막부 시작 77년 만에 끊기고, 동생 쓰나요시를 양자로 삼아 5대 쇼군으로 삼았다.[1] 쓰나요시도 친자식이 요절하여 이에쓰나의 동생이자 쓰나요시의 형인 쓰나시게의 장남이자 조카인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었다.[1] 이에노부의 뒤는 친아들 이에쓰구가 7대 쇼군이 되면서 이에미쓰-이에쓰나 부자 이후 32~3년 만에 부자 세습이 이루어졌지만, 1716년 (쇼토쿠 6년)에 8살로 요절하였다.[1]
이에쓰구의 요절로 히데타다-이에미쓰 부자의 핏줄에 의한 쇼군 세습은 끊어지고, 기슈 도쿠가와가에서 요시무네를 양자로 맞이해 8대 쇼군에 취임하였다.[1] 요시무네, 이에시게, 이에하루 3대에 걸쳐 70년간 직계 세습이 이어졌으나,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친자식(딸과 아들)은 모두 요절하여 고산쿄 중 하나인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에서 이에나리를 양자로 맞이해 11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1] 이에나리의 뒤는 아들 이에요시 (12대), 손자 이에사다 (13대)로 이어져 71~2년간 부자 세습이 계속되었지만, 이에사다는 친자가 없어 기슈가로부터 도쿠가와 요시토미 (이에모치)를 맞아 14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1] 하지만, 이에모치도 자식 없이 사망하여, 미토 도쿠가와가에서 태어나 히토쓰바시가의 당주가 된 요시노부가 15대 쇼군이자 마지막 쇼군이 되었다.[1]
이에미쓰가 원복할 때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이름 중 '이에(家)' 자를 받아 쓴 뒤부터, '이에(家)' 자는 도쿠가와 쇼군가(도쿠가와 종가) 적남의 돌림자가 되었다.[1] 역대 도쿠가와 쇼군 중 '이에(家)'가 붙지 않은 쇼군은 2대 히데타다, 5대 쓰나요시, 8대 요시무네, 15대 요시노부뿐이다.[1] 히데타다가 원복할 때에는 아직 막부가 성립되지 않아 당시의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히데(秀)' 자를 받았고, 쓰나요시, 요시무네, 요시노부는 당초 도쿠가와 쇼군가의 적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쇼군에게서 휘를 받았다.[1]
2. 3. 메이지 시대 이후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는 대정봉환 이후 쇼군직에서 물러나 신정부에 협력하며 은퇴 생활을 했다. 이에사토가 타야스 도쿠가와가에서 양자로 와 도쿠가와 종가를 이었다.
16대 당주 이에사토는 신정부로부터 스루가・토토미・이즈 70만 석을 받아 슨푸 (현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로 이주, 슨푸를 시즈오카로 개명하고 시즈오카번을 세웠다. 1869년 (메이지 2년) 화족이 되었고, 폐번치현 후 1871년 (메이지 4년) 도쿄로 이주했다.
1876년 (메이지 9년) 치츠로쿠 처분으로 지급된 킨로쿠 공채 액수는 56만 4429엔으로, 10위였다. (1위는 시마즈 공작가로 132만 2845엔이었다.)
1884년 (메이지 17년) 화족령 공포와 함께 이에사토는 공작 작위를 받았고, 도쿠가와 종가는 도쿠가와 공작가가 되었다. 무가에서는 도쿠가와 종가만이 큰 공 없이도 당연히 공작이 될 수 있었다. 도쿠가와 공작가에서 갈라져 나온 직속 분가로는 도쿠가와 아츠시 남작가가 있다.
초대 공작 이에사토는 1903년 (메이지 36년)부터 1933년 (쇼와 8년)까지 30년간 귀족원 의장을 지냈고, 아들인 17대 당주이자 2대 공작 이에마사는 전후 마지막 귀족원 의장을 역임했다.
도쿠가와 공작가의 저택은 1877년 (메이지 10년)부터 1943년 (쇼와 18년)까지 도쿄부 도쿄시 시부야구 센다가야에 있었으며, 부지 면적은 10만 평이 넘었다. 1943년 (쇼와 18년) 도쿄부가 부지와 저택을 매수하여 도쿄 체육관을 건설했다.
2003년 (헤이세이 15년), 18대 당주 츠네나리는 도쿠가와 기념재단을 설립하여 종가의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3. 역대 당주와 주요 자녀
세대 | 이름 | 출신 | 주요 자녀 | |
---|---|---|---|---|
도 | 초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안조 마쓰다이라가 | |
2대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도쿠가와씨 | ||
3대 | 도쿠가와 이에미츠 | 쇼군가 | ||
4대 | 도쿠가와 이에츠나 | 쇼군가 | 친자식 없음 | |
5대 | 도쿠가와 츠나요시 | 타테바야시 도쿠가와가 양자 | ||
6대 | 도쿠가와 이에노부 | 코후 도쿠가와가 양자 | ||
7대 | 도쿠가와 이에츠구 | 쇼군가 | 친자식 없음 (직계 단절) | |
8대 | 도쿠가와 요시무네 | 키슈 도쿠가와가 양자 | ||
9대 | 도쿠가와 이에시게 | 쇼군가 | ||
10대 | 도쿠가와 이에하루 | 쇼군가 | ||
11대 | 도쿠가와 이에나리 |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 양자 | ||
12대 | 도쿠가와 이에요시 | 쇼군가 | ||
13대 | 도쿠가와 이에사다 | 쇼군가 | 친자식 없음 | |
14대 | 도쿠가와 이에모치 | 키슈 도쿠가와가 양자 | 친자식 없음 | |
15대 | 도쿠가와 요시노부[5] | 미토 도쿠가와가 출신,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 양자 | ||
도 | 16대 | 도쿠가와 이에사토 | 타야스 도쿠가와가 양자 | |
17대 | 도쿠가와 이에마사 | 공작가 | ||
도 | 18대 | 도쿠가와 츠네나리 | 아이즈 마쓰다이라가 양자 |
3. 1. 도쿠가와 쇼군가
1603년(게이초 8년) 초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이타이쇼군에 취임하면서부터 1867년(게이오 3년) 15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할 때까지 264년에 걸친 에도 시대 동안 세이타이쇼군 직을 세습한 가계이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실질적 지배자로서, 무가 사회를 포함한 일본 사회 전체의 정점에 군림했다.
초대 쇼군 이에야스는 1605년(게이초 10년) 3남 히데타다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2대 쇼군으로 삼았다. (이에야스는 오고쇼로서 실권을 계속 쥐고 있었다.) 히데타다는 차남 이에미쓰(장남 초마루가 있었지만 이미 요절했었음)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3대 쇼군으로 삼았다. 이후 대대로 도쿠가와 쇼군가의 장남이 쇼군직을 세습하는 원칙을 정했다. 도쿠가와 쇼군가의 쇼군직 세습을 확립하기 위해 역대 당주들은 많은 측실을 거느리고 혈통 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종가는 종종 직계 후계자가 없어, 가까운 친척의 분가나, 이에야스의 아들을 시조로 하는 도쿠가와 고산케나 고산쿄로부터 양자를 맞이해서 가계를 잇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4대 쇼군 이에쓰나에게 직계 자손이 없어, 도쿠가와 쇼군가의 직계는 막부가 시작된 지 77년 만에 끊어졌다. 방계인 동생 쓰나요시를 양자로 삼아 5대 쇼군으로 삼았다. 쓰나요시도 친자식이 요절하여, 이에쓰나의 동생이자 쓰나요시의 형인 도쿠가와 쓰나시게의 장남이자 조카인 이에노부가 6대 쇼군이 되었다. 이에노부의 뒤는 친아들 이에쓰구가 7대 쇼군이 되면서, 이에미쓰-이에쓰나 부자 이후 32~3년 만에 부자 세습이 이루어졌지만, 1716년(쇼토쿠 6년) 8살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이에쓰구의 요절로 히데타다-이에미쓰 부자의 핏줄에 의한 쇼군 세습은 끊어지고, 기슈 도쿠가와가에서 도쿠가와 요시무네를 양자로 맞이해 8대 쇼군에 취임하였다.
요시무네, 이에시게, 이에하루의 3대가 이어지는 70년간은 직계에서 세습이 이어졌다. 10대 쇼군 이에하루의 친자식 딸과 아들 모두 요절해, 고산쿄 중 하나인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에서 도쿠가와 이에나리를 양자로 맞이해 11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에나리의 뒤는 아들 이에요시(12대), 손자인 이에사다(13대)로 이어져 부자에 의한 세습이 71~2년 계속되었다. 하지만 이에사다에게 친자가 없어, 기슈가로부터 도쿠가와 요시토미(이에모치)를 맞이해 14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에모치도 자식 없이 사망, 미토 도쿠가와가에서 태어나 히토쓰바시가의 당주가 된 요시노부가 15대 쇼군이자 마지막 쇼군이 되었다. 요시노부는 모계 혈통으로 히데타다의 혈통을 잇고 있다. 총 15명의 쇼군 중, 정실 소생은 이에야스, 이에미쓰, 요시노부 세 명뿐이다. 초대 쇼군 이에야스의 아버지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쇼군이 아니며, 요시노부는 미토 가문에서 태어났으므로, 쇼군의 정실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이에미쓰뿐이다.
이에미쓰가 원복했을 때, 할아버지 이에야스의 이름 중 '이에(家)'를 휘로 쓴 뒤로부터, "이에(家)" 자가 도쿠가와 쇼군가(도쿠가와 종가) 적남의 휘로 사용하는 돌림자가 되었다. 역대 도쿠가와 쇼군으로 휘에 "이에(家)"가 붙지 않은 쇼군은 2대 히데타다, 5대 쓰나요시, 8대 요시무네, 15대 요시노부 네 명뿐이다. 히데타다가 원복했을 때에는 아직 막부가 성립되지 않았고, 당시의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히데(秀)'라는 글을 휘로 받았기 때문이다. 쓰나요시, 요시무네, 요시노부 세 명은 당초 도쿠가와 쇼군가의 적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의 쇼군으로부터 휘를 받았다.
쓰나요시는 이에미쓰의 4남이었기 때문에 적남이 아니었고, 원복 때 형이자 당시 쇼군이었던 이에쓰나에게서 '쓰나(綱)'라는 휘를 받았다. 요시무네는 키슈가 출신이지만, 키슈 번주 취임 시 당시 쇼군 쓰나요시로부터 '요시(吉)'라는 휘를 받았다. 요시노부는 미토가 출신이지만, 당주가 요절한 히토쓰바시가를 이은 후, 당시 쇼군 이에요시에게 '요시(慶)'라는 휘를 받았다.
6대 이에노부는 고후 도쿠가와가의 적남으로 원복 시 이에쓰나에게 휘를 받아 '쓰나토요(綱豊)'라고 하였지만, 쓰나요시의 양자가 된 후 돌림자를 포함해서 이에노부로 개명했다. 14대 이에모치는 키슈가의 적남으로서 원복했을 때 당시 12대 쇼군 이에요시로부터 '요시(慶)'라는 휘를 받아 '요시토미(慶福)'라고 하였지만, 13대 이에사다의 후계자가 된 후 14대 쇼군에 취임했을 때 돌림자를 포함해서 이에모치로 개명했다.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는 대정봉환 후 쇼군직을 사임하고, 일단 병사를 이끌기는 하였으나 신정부에 공순해 근신하였다. 요시노부는 은퇴하였고, 고산쿄 중 하나인 타야스 도쿠가와가에서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양자가 되어 도쿠가와 종가의 상속을 허락받았다.
세대 | 이름 | 출신 | 주요 자녀 | |
---|---|---|---|---|
초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안죠 마츠다이라가 | ||
2대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도쿠가와씨 | ||
3대 | 도쿠가와 이에미츠 | 쇼군가 | ||
4대 | 도쿠가와 이에츠나 | 쇼군가 | 친자식 없음 | |
5대 | 도쿠가와 츠나요시 | 타테바야시 도쿠가와가에서 양자 | ||
6대 | 도쿠가와 이에노부 | 코후 도쿠가와가에서 양자 | ||
7대 | 도쿠가와 이에츠구 | 쇼군가 | 친자식 없음. (이에미츠 이래로 이어오던 직계 단절) | |
8대 | 도쿠가와 요시무네 | 키슈 도쿠가와가에서 양자 | ||
9대 | 도쿠가와 이에시게 | 쇼군가 | ||
10대 | 도쿠가와 이에하루 | 쇼군가 | ||
11대 | 도쿠가와 이에나리 |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에서 양자 | ||
12대 | 도쿠가와 이에요시 | 쇼군가 | ||
13대 | 도쿠가와 이에사다 | 쇼군가 | 친자식 없음 | |
14대 | 도쿠가와 이에모치 | 키슈 도쿠가와가에서 양자 | 친자식 없음 | |
15대 | 도쿠가와 요시노부[5] | 미토 도쿠가와 출신 →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에서 양자 |
3. 2. 도쿠가와 공작가 (메이지 이후)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16대 당주가 된 후, 신정부에 의해 스루가·도토미·이즈 70만 석을 다시 받고 슨푸(현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로 이주하여 슨푸를 시즈오카로 개명하고 시즈오카 번을 세웠다. 1869년(메이지 2년) 화족에 올랐고, 폐번치헌을 거쳐 1871년(메이지 4년) 도쿄로 다시 이주했다.[1]
1876년(메이지 9년) 치츠로쿠 처분으로 가록 대신 지급된 킨로쿠 공채 액수는 56만 4429엔으로, 10위였다.
순위 | 가문 | 금액(엔) |
---|---|---|
1 | 시마즈 공작가 | 132만 2845 |
2 | 마에다 후작가 | 119만 4077 |
3 | 모리 공작가 | 110만 7755 |
4 | 호소카와 후작가 | 78만 280 |
5 | 오와리 도쿠가와 후작가 | 73만 8362 |
6 | 키슈 도쿠가와 후작가 | 70만 6110 |
7 | 야마우치 후작가 | 66만 8200 |
8 | 아사노 후작가 | 63만 5433 |
9 | 나베시마 후작가 | 60만 3598 |
10 | 도쿠가와 공작가 | 56만 4429 |
[1]
1884년(메이지 17년) 화족령 공포와 함께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공작 작위를 받았고, 도쿠가와 종가는 도쿠가와 공작가가 되었다. 서작 내규에서는 공작의 서작 기준을 "친왕 등 왕족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 구 셋케, 도쿠가와 종가, 국가에 큰 공이 있는 자"로 규정하여, 무가에서는 도쿠가와 종가만이 큰 공훈 없이도 당연히 공작이 될 수 있는 위치였다. 도쿠가와 공작가로부터 직속 분가한 화족으로는 도쿠가와 아츠시 남작가가 있다.[1]
초대 공작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1903년(메이지 36년)부터 1933년(쇼와 8년)까지 30년 동안 귀족원 의장을 지냈고, 적자인 17대 당주이자 2대 공작인 도쿠가와 이에마사는 전후 마지막 귀족원 의장을 역임했다.[1]
도쿠가와 공작가의 저택은 1877년(메이지 10년)부터 1943년(쇼와 18년)까지 도쿄부 도쿄시 시부야구 센다가야에 있었으며, 부지 면적은 10만 평이 넘었다. 세간에서는 '센다가야 고텐(千駄ヶ谷御殿)'이라고 불렀다. 1943년(쇼와 18년) 도쿄부가 연성도장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지와 저택을 매수하여 '아오이칸(葵館)'이라 명명했으며, 그 후 목조 건축물은 제거되고, 철근 콘크리트 양관 2동은 이축된 후, 1956년(쇼와 31년) 도쿄 체육관이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1]
2003년(헤이세이 15년), 18대 당주 도쿠가와 쓰네나리는 종가의 귀중한 유산을 관리하기 위해 재단법인(현 공익재단법인) 도쿠가와 기념재단을 설립하였다.[1]
참조
[1]
웹사이트
歴史・沿革|東京体育館|公益財団法人東京都スポーツ文化事業団
https://www.tef.or.j[...]
[2]
뉴스
財団について 概要
http://www.tokugawa.[...]
公益財団法人 德川記念財団
2024-08-16
[3]
뉴스
徳川家康の子孫 宗家が当主交代 19代家広氏が家督継承へ
http://www.tokugawa.[...]
NHKNEWSWEB
2022-10-25
[4]
뉴스
徳川19代、家督継承を報告 親族らに「未来へつなぐ」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23-01-19
[5]
문서
慶喜は、隠居・謹慎の後、[[1902年]](明治35年)には公爵を授けられ、[[徳川慶喜家]]を立てて初代当主となった。
[6]
문서
(紀州)[[徳川光貞]]の四男。頼宣の孫。
[7]
문서
(一橋)[[徳川治済]]の長男。宗尹の孫。
[8]
문서
(水戸)[[徳川斉昭]]の七男。一橋家9代当主。
[9]
문서
高須藩主・[[松平義建]]の五男。一橋家10代当主。
[10]
문서
(田安)[[徳川慶頼]]の三男。
[11]
문서
(会津)[[松平一郎]]の次男。母は家正長女・豊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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